친애하는 벗에게

친애하는 나의 벗, 마티아스에게.

언제나 그 깊은 학식과 통찰력, 그리고 비할 데 없는 미덕인 겸손을 두루 갖춘 자네를 늘 존경하고 흠모해 마지 않는 바이네. 내, 스스로 학자니 지식인이니 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자네도 잘 아는 바지. 지나간 날의 위대한 영웅과 선조들이 남긴 유산과 영원히 전해질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마치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린 해부용 사체마냥 빈틈없이 소독해 방부처리하고 낱낱히 분해해버리고서는, 스스로가 위대한 역사가이니 떠드는 저 파렴치한들 말일세. 자네는 흰 까마귀 같이 그런 무리에서 소외되고 치이면서도, 그나마 참 길을 찾는 이에게 희망의 불빛을 던져주는 등대와도 같네. 내 그래서 자네를 좋아하지.

특히 최근에 교회 측 학자들의 행각을 지켜보노라면, 끓어오르는 분노에 찬 눈빛이 양피지를 태워버릴 지경이네. 더구나 최근 고대 제국과 요정들에 관해 조사하는 터라 더욱 격정을 억누르기 어렵네. 우노스 정교회가 건국 직후 시기에 마녀 사냥을 일삼아 천년을 이어온 전승이 끊기고, 저 지혜롭고 고귀한 요정들의 몇 안되는 귀중한 기록들도 금서로 처분해 불태워버린 과거는 자네도 생생히 알잖는가. 자네도 최근 그 크리스소스토무스 수사와 한차례 논쟁을 주고 받았다고 들었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오래 감추인 역사의 우물에서 지혜와 참된 가르침을 끌어올리는 일을 쉬지 말게나.

이러한 형편 중에도, 몇몇 젊은이들이 오랜 겨울에 메마르고 얼어붙은 대지를 촉촉히 어루만지는 봄비와 같이 내 마음에 기쁨을 준다네. 특히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젊은이는, 저 교회가 삼백년 동안 채워놓은 육중한 자물쇠와 쇠사슬을 깨뜨리고 푸른 창공을 자유로이 노니는 산새와도 같으이.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 안에 살아 숨쉬는 영혼이 저 요정들의 넥타르(꿀술)을 맛보는 듯 하네. 그가 발굴해낸 옛 요정들의 글들은 지금도 생생히 살아서, 우리의 멈춰버린 심장을 두드리고 밤하늘에 빛나는 샛별 같이 찬연한 아름다움으로 빛나지 않는가. 그의 글들이 교회의 고문관들과 학계의 박제사들로 인해 쇠토막 같이 차갑고 메마르기 그지 없는 합리와 이성으로 옭죄어지고 위축되버린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금 진정한 인간 영혼 본연의 자유와 열정, 활력을 일깨우길 바라네. 그의 아름다운 문체를 보고 있노라면, 도무지 남자의 것으로는 믿을 수가 없네. 저 위대한 음유시인, 아넬리아드 아프 위아르의 환생에 비길까, 아니 차라리 이 땅에 눈 뜬 사람들에게 처음 노래와 시를 가르쳐준 저 요정들이 돌아왔다고 하는 것이 맞으리. 내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그가 쓰고자 하는 작품을 지원하고 싶네. … 즉, 자네에게 부탁하는 걸세.

또 한 명, 피디아스 바르삭이란 젊은이도 내 눈을 사로잡게 했다네. 예사 왕실사학자 답지 않게, 거창하고 허황된 글귀로 가득찬 빈말이 아니라 진솔하면서도 힘 있게 제 목소리를 내는 그 당당한 모습이란. 그의 [일곱가지 선물]은 좀처럼 학계에는 관심갖지 않는 나로서도, 그의 다음글을 학수고대하게 만들었다네. 십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일이지. 아, 물론 자네 글은 빼놓고 말일세. 한데 그 다음 글은 같은 펜 끝에서 나왔다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글이었네. 그 한없는 독기와 비열한 냉소를 가득 담은 한철 비수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줄이야. 게다가 그 표적이 내가 가장 경애해 마지않는 벗을 향하고 있었기에 내 마음은 찢어지는 듯 했네. 자네를 향한 걱정 만큼이나, 그 창창한 젊은이가 안고 있는 비틀린 삶의 무게에. 다행히 자네를 향한 그 매섭고 가열찬 화살은 무위로 돌아갔으나, 나는 장차 거목이 될 어린 나무가 가시덤불에 집어삼키우나 싶어 너무나 안타깝네. 그가 자네의 제자라고 들었는데, 참으로 하늘에 원망스런 일일세. 어쨌든 나는 희망을 놓지 않고 그의 앞길을 지켜볼 터이네.

그 외에도 새로이 등장한 젊은 문객들에게 많은 기대를 갖고 지켜보고 있네. 오랜 기득권과 소위 말하는 전통에 찌들은 이 역사학계라는 곳의 희망은 그런 젊은 세대들 뿐이니까. 자네 혼자만이 그동안 자기 소굴에서 온갖 탐욕과 권력욕으로 거미줄을 자아내며 미끼만 걸리면 무자비하게 집어삼키는 노마(老魔)들과 외로이 싸워오지 않았나. 나도 그러한 희망을 안고 계속 펜을 놀려볼 작정이라네.

참, 자네 손녀 릴리 양에게 안부 전해주게. 지금 쓰고 있는 건국왕 초기 이야기가 책으로 엮이게 되면, 자네와 릴리 양에게 헌정하고 싶군. 출판사 녀석들은 뭐가 그리 맘에 안 드는 점이 많은지 매일같이 잔소리라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초고가 정리되는 대로 릴리 양에게 어서 보여주고 싶군. 릴리 양은 언제나 내게 가장 호의적이면서도 누구보다 깊이있는 식견과 조언으로 도와줬던 최고의 독자라네. 혼담이 오갈 시기가 되었으니, 좋은 짝을 만나야 할텐데 말일세. 내가 나이가 한 십 년 쯤만 젊었으면 당장 프로포즈했겠지만, 이젠 낭만이 아니라 주책이라고 할 나이를 먹었으니 껄껄. 암튼 꼭 최고의 신랑감이어야 하네. 자네도 누구보다 릴리 양을 사랑하는 줄 알지만, 어디가서 시장 거리의 늘어져 멀건 눈알 굴리는 생선대가리 같은 녀석을 데려왔다간 나한테 혼날 줄 알게나.

집안의 평안과 건필을 바라네. 산들의 곡식과 열매를 알알이 여물게 하는 가을 햇볕의 은총이 늘 자네에게 함께 하길.

사랑하는 그대의 벗, 할루크가.

추신: 참, 여행길에 관절염과 노안에 제일로 특효라는, 가시오갈피와 결명자를 구해 함께 부치네.

댓글

정석한, %2007/%10/%25 %23:%Oct:

가시오갈피와 결명자 >_<b

 
_엔, %2007/%10/%26 %00:%Oct:

진짜 중년의 음유시인이 쓴 것 같은, 아저씨 문체와 시적인 감성의 결합이 읽기 즐거운 글이었습니다. 기사 쓰실 때보다 훨씬 화려하고 장식적이 되신 문체도 -할루크 씨의 개성을 잘 드러내는 것 같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매력 있어서 좋았고요.

프루스트에 대한 칭찬과 그의 정체에 대한 뜨끔한 통찰, 따뜻한 마음 잘 보았고요. 릴리에 대한 부분에서는 푸근하고 마음 따뜻한 할아버지 친구의 모습이 너무 잘 그려져 있어서 웃었습니다.

 
로키, %2007/%10/%27 %00:%Oct:

따뜻하고 소탈한 성격과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 둘 다 잘 드러나는 글이네요. 왜 말덴씨와 펜너옹이 친구인지 알 수 있는 기분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엔님이 다 하신 것 같고, 덧붙여서 가시오갈피와 결명자를 손에 쥐고 부들부들 떠는 펜너 옹의 모습을 연상했습..(..)

 
로키, %2010/%07/%16 %20:%Jul:

오랜만에 다시 보는데, 눈빛이 양피지를 태운다는 대목에서 눈에서 레이져 빔을 쏘는 노 음유시인을 상상해버린(..) 언제 봐도 생생하고 재밌군.